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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데 알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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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드로 데 알바라도는 1485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스페인 정복자이자 군인이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쿠바 정복에 참여했고, 그리할바 원정대와 코르테스의 멕시코 원정에 참여하여 아즈텍 제국 정복에 기여했다. 1520년 테노치티틀란에서 벌어진 대학살을 주도했고,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를 정복하며 잔혹한 행위를 보였다. 그는 페루 원정에 참여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온두라스 주지사직을 놓고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1541년 믹스톤 반란을 진압하려다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지만,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성격으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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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데 알바라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틀락스칼라 역사에 묘사된 알바라도 (c. 1550).
틀락스칼라 역사에 묘사된 알바라도 (c. 1550).
본명페드로 데 알바라도 이 콘트레라스
출생1485년경
출생지바다호스, 카스티야 왕국
사망1541년 7월 4일 (55세 또는 56세)
사망지과달라하라, 누에바에스파냐
개인 정보
배우자프란시스카 데 라 쿠에바 (1527년 결혼; 1532년경 사망)
베아트리스 데 라 쿠에바 (1538년 10월 17일 결혼)
파트너루이사 데 틀락스칼라 (1519–1535)
자녀5명 (루이사와의 사이에서 3명)
경력
직업콩키스타도르, 과테말라 총독

2. 초기 생애와 가족

페드로 데 알바라도는 1485년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의 바다호스에서 하급 귀족 가문의 자제로 태어났다.[18] 그의 아버지는 고메스 데 알바라도였고,[23] 어머니는 레오노르 데 콘트레라스였다.[18] 알바라도는 사라라는 쌍둥이 여동생과 호르헤, 곤살로, 고메스, 후안 등 네 명의 친형제가 있었다.[19] 또한 '후안 엘 바스타르도'(Juan el Bastardo)라고 불린 이복 형제 후안도 있었다.[20]

알바라도의 외할아버지는 코멘다도르였던 후안 알바라도 "엘 비에호"(장로)였고, 외할머니는 카탈리나 메시아였다.[18] 아버지 쪽 삼촌은 디에고 데 알바라도 이 메시아였는데,[23] 그는 오르나초스의 코멘다도르이자 레콩키스타 기간 동안 무어인에 대항하는 전투에서 베테랑이었다.[18]

알바라도가 아메리카로 오기 전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21]

2. 1. 아메리카로의 이주

알바라도 형제는 1510년 또는 1511년에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했다.[24] 히스파니올라에 잠시 머물렀지만, 그곳에서의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26] 알바라도는 산토도밍고에서 에르난 코르테스와 친분을 쌓았고,[28] 이후 디에고 벨라스케스쿠바 정복에 참여했다.[28]

3. 아메리카에서의 초기 활동

알바라도 형제는 1511년 이전에, 아마도 1510년에 대서양을 건넜다.[24] 1511년에 스페인에서 신대륙으로 향하는 식민 개척자들의 흐름을 통제하기 위한 허가 제도가 확립되었는데, 알바라도 형제 중에는 후안 데 알바라도만이 1511년에 등록부에 등장한다. 이는 다른 형제들이 허가 제도 시행 이전에 이미 아메리카 대륙에 와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25] 알바라도 형제는 히스파니올라에 들렀지만, 그곳 체류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26]

히스파니올라의 산토도밍고에 도착한 직후, 페드로 데 알바라도는 당시 공증인으로 일하고 있던 에르난 코르테스와 친분을 쌓았다. 알바라도는 디에고 데 벨라스케스의 지휘 아래 쿠바 정복에 참여하기 위해 코르테스에 합류했다.[28] 쿠바 정복은 1511년에 시작되었으며, 페드로 데 알바라도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했다.[27] 정복 직후, 알바라도는 새로운 식민지에서 번영하는 아시엔다를 운영하고 있었다.[28] 이 무렵 페드로 데 알바라도는 역사 기록에 번영하고 영향력 있는 아시엔다 소유주로 등장하며, 쿠바 총독이 된 벨라스케스와 이미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27]

이후 알바라도는 후안 데 그리할바가 이끄는 유카탄 반도 탐험(그리할바 원정대 (1518))에 참여하였고,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끄는 멕시코 원정(코르테스의 멕시코 원정 (1519-1521))에도 참여하여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3. 1. 그리할바 원정대 (1518)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유카탄 반도에서 금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고 고무되었다.[29] 그는 네 척의 배와 260명의 병사로 구성된 원정대를 조직했다.[30] 그는 자신의 조카 후안 데 그리할바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31] 페드로 데 알바라도는 함선 중 한 척의 선장이었다.[32] 이 소규모 함대는 석궁, 소총, 교역품,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카사바 빵으로 채워졌다.[33]

함대는 1518년 4월 쿠바를 떠나[35] 유카탄 동해안의 코수멜 섬에 처음 상륙했다.[36] [35] 마야 주민들은 스페인인들을 피해 도망쳤고, 함대는 코수멜에서 남쪽으로 유카탄 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항해했다.[34] 스페인 사람들은 해안을 따라 세 개의 큰 마야 도시를 발견했다. 승천 축일에 함대는 큰 만을 발견했고, 스페인 사람들은 이곳을 바이아 데 라 아센시온(Bahía de la Ascensión)이라고 이름 붙였다.[35]

그리할바는 이 도시들 중 어느 곳에도 상륙하지 않고 북쪽으로 돌아 유카탄 반도 북쪽을 돌아 서해안으로 내려갔다.[34] 캄페체에서 스페인 사람들은 소형 대포로 도시에 사격을 가했고, 주민들은 도망쳤고 스페인 사람들은 버려진 도시를 점령할 수 있었다. 마야인들은 숲 속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배에 올라타고 해안을 따라 계속 항해했다.[36]

참포톤에서 함대는 소수의 큰 전투 카누에 접근했지만, 배의 대포는 곧 그들을 쫓아버렸다.[36] 타바스코 강 어귀에서 스페인 사람들은 대규모 전사들과 카누들을 발견했지만, 원주민들은 접근하지 않았다.[37] 통역가들을 통해 그리할바는 무역을 원한다는 뜻을 전했고, 음식과 다른 물품과 교환으로 포도주와 구슬을 거래했다. 원주민들로부터 그들은 약간의 금 장식품과 서쪽의 아즈텍 제국의 부에 대한 소식을 얻었다. 원정대는 금이 풍부한 제국의 현실을 확인하기에 충분히 멀리 항해했고,[38] 파누코 강까지 북쪽으로 항해했다.[35]

파팔로아판 강에서 알바라도는 그의 배를 강 상류로 몰고 갔는데, 이는 나머지 소규모 함대가 강 어귀에서 그를 기다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행동은 그리할바를 크게 화나게 했는데, 그는 한 척의 배가 잃어버릴 수 있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 후 스페인 사람들은 이 강을 "리오 데 알바라도"(Río de Alvarado, "알바라도 강")라고 불렀다.[39] 해안을 조금 더 따라가자 함대는 아즈텍 지배하의 정착촌을 만났고, 황제 몬테수마 2세가 보낸 금과 보석 선물을 가진 아즈텍 사절을 만났다.[40]

명령 없이 파팔로아판 강에 들어간 것에 대한 처벌로, 그리할바는 알바라도를 '산 세바스티안'호(San Sebastián)와 함께 쿠바로 발견 사실을 전달하도록 보냈다. 알바라도는 원정대에서 얻은 부를 크게 과시하며 산티아고 데 쿠바에 개선적인 입성을 했다. 쿠바에 일찍 도착함으로써 그는 그리할바가 돌아오기 전에 총독 벨라스케스에게 환심을 살 수 있었다.[41] 나머지 함대는 출발한 지 5개월 만에 하바나 항구에 입항했다.[35] 그리할바는 알바라도가 자신에 대해 돌려놓았던 총독에게 냉담하게 받아들여졌고, 알바라도는 원정의 영광을 대부분 자신에게 돌렸다.[42]

3. 2. 코르테스의 멕시코 원정 (1519-1521)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끈 아즈텍 정복 원정대는 쿠바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 11척의 함선, 500명의 병사, 그리고 약간의 말을 포함한 새로운 원정대가 조직되었다. 코르테스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페드로 데 알바라도와 그의 형제들(호르헤, 고메스, 후안 "엘 바스타르도")이 원정에 합류했다.[35] 코르테스는 알바라도에게 쿠바 내륙 영지에서 병력을 모으도록 지시했다.[42] 크리스토발 데 올리드, 곤살로 데 산도발, 디에고 데 오르다스 등 훗날 유명한 정복자가 된 장교들이 함선에 포함되었다. 프란시스코 데 몬테호와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 등 그리할바 원정대의 베테랑들도 합류했다.[35]

알바라도는 60명의 부하와 함께 ''산 세바스티안''호를 지휘했다.[43] 함대는 코수멜에 처음 상륙하여 며칠 동안 머물렀고, 마야 사원들이 파괴된 후 한 사원에 기독교 십자가가 세워졌다.[35] 이후 함대는 유카탄 반도 북쪽을 돌아 해안을 따라 타바스코 강으로 향했다.[44] 타바스코에서 함대는 포톤찬에 정박했는데,[45] 이곳은 콘탈 마야 마을이었다.[46] 마야인들은 전투를 준비했지만, 스페인의 말과 화력은 전투 결과를 빠르게 결정지었다.[45] 포톤찬에서 함대는 산 후안 데 울루아로 이동하여 짧게 머무른 후, 키아우이스틀란 근처 곶과 아즈텍 제국의 속국인 셈포알라로 이동했다.[48][45] 코르테스가 내륙으로 진군할 때 알바라도는 그와 동행했다.[49] 테노치티틀란으로 가는 동안 원정대는 틀락스칼라 땅을 통과하며 우회했다. 틀라스칼라인들은 여러 차례 스페인 군대를 공격했지만 격퇴당했고, 이후 틀라스칼라인들과 동맹을 맺은 스페인은 아즈텍을 정복했다.[50]

알바라도는 원정대가 아즈텍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처음 머무는 동안 코르테스의 부사령관 역할을 수행했다.

3. 2. 1. 테노치티틀란 대학살 (1520)

에르난 코르테스판필로 데 나르바에스 원정대를 상대하기 위해 멕시코만 연안으로 간 사이, 알바라도는 테노치티틀란에 남아 스페인군을 지휘했다.[51] 코르테스가 자리를 비운 동안 스페인인과 아스테카인들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알바라도는 대사원 학살을 일으켜 종교 축제 중이던 아스테카 귀족과 사제들을 살해했다.[100] 알바라도는 아스테카인들이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없으며 고문당한 포로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52]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으로 돌아왔을 때, 스페인 군대는 포위된 상태였다. 몬테수마 2세가 협상 중 사망한 후, 스페인군은 호수를 건너 도시에서 본토로 이어지는 제방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다.[100] 1520년 7월 10일, 슬픈 밤으로 알려진 밤의 전투에서 알바라도는 후위를 맡았고 큰 부상을 입었다.[100][53] 알바라도가 제방의 틈을 건너 탈출한 것은 '살토 데 알바라도'(알바라도의 도약)라고 불리게 되었다.[100]

3. 2. 2. 테노치티틀란 공방전 (1521)

에르난 코르테스 휘하 4개 부대 중 하나를 지휘하며 테노치티틀란 공성전에 참여했다.[100] 쿠아우테목이 세 개의 스페인 진영을 모두 공격했을 때 부상을 입었다.[100] 알바라도의 부대는 틀라텔롤코 시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아즈텍 신전에 불을 질렀으며, 곤살로 데 산도발의 부대와 코르테스의 부대는 4일간의 전투 후 그곳에 합류했다.[100]

4.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정복 (1523-1528)

에르난 코르테스는 180명의 기병, 300명의 보병, 석궁, 머스켓, 4문의 대포, 많은 양의 탄약과 화약, 그리고 수천 명의 동맹 메소아메리카 전사들을 포함한 군대를 이끌고 페드로 데 알바라도를 파견하여 과테말라를 침공하게 했다.[55] 알바라도의 군대에는 아즈텍 정복에 참여했던 노련한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기병과 포병도 갖추고 있었다.[57] 또한 촐룰라, 테노치티틀란, 텍스코코, 틀락스칼라, 소치밀코 출신의 많은 원주민 동맹군도 합류했다.[58]

알바라도는 소코누스코에서 평화롭게 받아들여졌고, 주민들은 스페인 왕실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은 이웃 과테말라 집단들이 스페인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 때문에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보고했다.[59] 1524년까지 소코누스코는 알바라도와 그의 군대에 의해 완전히 평정되었다.[60]

틀락스칼라 천의 한 페이지로 케찰테낭고 정복을 보여준다.


알바라도와 그의 군대는 과테말라 서부의 사말라 강에 도달할 때까지 태평양 연안을 따라 저항 없이 진군했다. 이 지역은 키체 왕국의 일부였으며, 키체 군대는 스페인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강을 건넌 정복자들은 키체인들을 위협하기 위해 인근 마을들을 약탈했다.[61] 1524년 2월 8일, 알바라도의 군대는 셰툴룰(멕시코 동맹군이 사포티틀란이라고 부름, 현대 산프란시스코 사포티틀란)에서 전투를 벌였다. 키체 궁수들이 입힌 많은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군과 그들의 동맹군은 도시를 점령하고 시장에 진지를 구축했다.[62]

알바라도는 키체의 중심지로 향해 시에라마드레 산맥을 따라 강을 거슬러 올라갔고, 케찰테낭고의 비옥한 계곡으로 통하는 고개를 넘었다. 1524년 2월 12일, 알바라도의 멕시코 동맹군은 고개에서 키체 전사들에게 매복 공격을 받아 격퇴되었지만, 그 뒤를 이은 스페인 기병의 돌격은 말을 본 적이 없는 키체인들에게 충격이었다. 기병은 키체인들을 흩어놓았고 군대는 셰라후(현대 케찰테낭고) 도시로 진격했지만 도시는 버려진 상태였다.[63]

낮은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풀과 관목으로 뒤덮인 유적. 무너진 낮고 네모난 탑이 오른쪽 뒤에 서 있으며, 토힐 신전의 잔해이며, 앞쪽 왼쪽에는 공놀이장 벽의 잔해가 있다.
알바라도의 군대에 의해 불타기 전까지 쿠마르카지는 키체 왕국의 수도였다.


1524년 2월 18일,[64] 키체 군대는 케찰테낭고 계곡에서 스페인 군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완전히 패배했다. 많은 키체 귀족들이 사망했다.[67] 이 전투로 키체는 군사력이 약화되어 평화를 요청하고 조공을 바쳤으며, 스페인의 나우아틀어를 사용하는 동맹군에게 테크판 우타틀란으로 알려진 수도 쿠마르카지로 알바라도를 초대했다. 알바라도는 키체의 의도를 의심했지만 제안을 받아들여 군대와 함께 쿠마르카지로 진군했다.[65]

1524년 3월, 알바라도는 쿠마르카지에 입성했다.[66] 그는 함정을 두려워하여[67] 도시 안에 숙소를 마련하는 대신 도시 밖 평야에 진을 쳤다.[68] 그는 도시 밖에 모인 많은 키체 전사들과 쿠마르카지의 좁은 거리에서 기병이 기동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우려하여, 도시의 주요 영주인 옥시브-케(왕)와 벨레헤브-츠이(왕세자)를 자신의 진영으로 초대했다.[69]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알바라도는 그들을 체포하여 진영에 가두었다. 키체 전사들은 그들의 영주들이 잡힌 것을 보고 스페인의 원주민 동맹군을 공격하여 스페인 병사 한 명을 죽였다.[70] 이때 알바라도는 붙잡힌 키체 영주들을 불태워 죽이기로 결정하고 도시 전체를 불태웠다.[71] 쿠마르카지 파괴와 통치자 처형 후, 알바라도는 익심체 (카크치켈의 수도)에 메시지를 보내 남은 키체 저항군에 대항하는 동맹을 제안했다.[65]

1524년 6월, 알바라도는 쿠스카틀란으로 지배권을 확장하려는 첫 시도를 이끌었다.[104] 아카후틀라 전투에서 초기에 성공했지만, 쿠스카틀란 원주민들은 스페인 군대와 보조군을 물리치고 과테말라로 후퇴하게 했다. 알바라도는 왼쪽 허벅지에 부상을 입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았다.[104] 그는 전쟁을 포기하고 동생인 곤살로 데 알바라도에게 임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했다. 이후 두 차례의 추가 원정(1525년 첫 번째, 1528년 소규모 부대)을 통해 피필족을 스페인의 지배하에 두었다. 1528년 쿠스카틀란 정복이 완료되고 산살바도르 시가 건설되었다.[104]

4. 1. 과테말라 정복 (1523-1524)

1523년, 알바라도는 스페인 군대와 트라스칼라인 연합군을 이끌고 과테말라 태평양 연안에 상륙하여 고지대로 진격했다.[104] 그는 원주민 왕국을 무너뜨리면서 1524년 과테말라를 정복했다.[104]

1524년 5월 8일, 페드로 데 알바라도는 약 6,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태평양 연안 평야로 진군하여 5월 9일 이스쿠인테페크 근처에서 파나칼 또는 파나칼테페케의 피필족을 물리쳤다.[88] 알바라도는 도시 접근 지형이 험준하여 기병대 대신 석궁병을 앞세웠다. 폭우로 인해 피필족이 정찰병을 철수시켜 스페인군과 동맹군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 수비병들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90] 전투에서 스페인군과 원주민 동맹군은 경미한 손실을 입었지만, 피필족은 숲으로 도망쳐 스페인군의 추격을 피할 수 있었다. 알바라도는 도시를 불태우고 피필족 영주들에게 항복을 요구했다.[90] 알바라도의 편지에 따르면, 피필족은 도시로 돌아와 스페인 국왕을 봉건 영주로 받아들였다.[89] 몇 년 후인 1529년, 알바라도는 이스쿠인테페크 정복에서의 잔혹 행위로 비난받았다.[91]

틀락스칼라 그림에서 이스쿠인테페크 정복을 묘사한 한 페이지


과사카판에서 알바라도는 마야족도 피필족도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아마도 신카족이었을 것이다.[92] 이때 알바라도의 군대는 250명의 스페인 보병과 주로 카크치켈족과 콜루테카족으로 구성된 6,000명의 원주민 동맹군으로 구성되었다.[93] 알바라도와 그의 군대는 아티키파케라는 가장 중요한 신카족 도시를 정복했다. 이 전투는 1524년 5월 26일에 일어났으며, 신카족 인구의 상당한 감소로 이어졌다.[92]

후티아파의 태평양 사면은 신카족과의 여러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알바라도 군대는 동쪽으로 진군하여 여러 신카족 도시를 점령했다. 신카어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알바라도는 선봉대와 후위대에 각각 10명의 기병을 배치했다. 이러한 예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타키스코를 떠난 직후 신카족 군대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많은 원주민 동맹군이 사망했고, 대부분의 수하물이 손실되었다.[94] 알바라도는 난친틀라에 8일 동안 군대를 주둔시켰다.[95] 현재 후티아파 주에 있는 파사코 도시의 사자들은 정복자들에게 평화를 제안했지만, 알바라도가 다음 날 도착했을 때 주민들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알바라도 군대는 그들을 신속하게 격퇴했다. 파자코에서 알바라도는 파스 강을 건너 현재 엘살바도르가 된 곳으로 진입했다.[97]

알바라도는 곧 카크치켈족에게 조공으로 금을 요구하여 우정이 틀어졌다.[81] 카크치켈족은 1524년 8월 28일 도시를 버리고 숲과 언덕으로 도망쳤다. 10일 후 스페인은 카크치켈족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81] 2년 후인 1526년 2월 9일, 16명의 스페인 탈영병들이 아포 샤힐의 궁전을 불태우고 사원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카크치켈족은 이를 알바라도의 책임으로 돌렸다.[84][85] 카크치켈족은 수년 동안 스페인에 저항했다. 1530년 5월 9일, 가장 중요한 두 씨족의 왕들이 야생에서 돌아왔다.[81] 하루 후, 많은 귀족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합류했고, 그들은 시우다드 비에하의 새로운 스페인 수도에서 항복했다.[81]

4. 2. 카크치켈족과의 동맹과 반란

알바라도는 카크치켈족에게 조공으로 금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두 민족 간의 우호 관계는 틀어졌다.[81] 알바라도는 카크치켈족 왕들에게 각각 15페소(peso) 가치의 금박 1000장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82][83] 1524년 8월 28일, 카크치켈족은 도시를 버리고 숲과 언덕으로 도망쳤으며, 10일 후 스페인은 카크치켈족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81]

1526년 2월 9일, 16명의 스페인 탈영병들이 아포 샤힐의 궁전을 불태우고, 사원을 약탈하고, 사제를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카크치켈족은 이 사건을 페드로 데 알바라도의 책임으로 돌렸다.[84][85] 카크치켈족은 수년 동안 스페인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1530년 5월 9일, 가장 중요한 두 씨족의 왕들이 오랜 전투와 농작물 포기로 인해 힘이 다하여[86] 야생에서 돌아왔다.[81] 하루 후, 많은 귀족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합류했고, 시우다드 비에하의 새로운 스페인 수도에서 항복했다.[81]

4. 3. 엘살바도르 정복 (1524-1528)

알바라도는 1524년 6월에 스페인 군대를 이끌고 쿠스카틀란(현재의 엘살바도르)으로 지배권을 확장하려는 첫 시도를 이끌었다.[104] 이 과정에서 1525년 산호세 아카템파, 1560년 에스키풀라스와 같은 많은 도시들이 세워졌다. 하지만 피필족과 그들의 마야어를 사용하는 이웃들은 스페인의 지배에 강력하게 저항했다.[104] 아카후틀라 전투에서 알바라도가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쿠스카틀란 원주민들은 스페인 군대와 그들의 보조군을 물리치고 과테말라로 후퇴하도록 강요했다. 전통에 따르면 아틀라카틀이라는 족장이 이들을 이끌었다고 한다.[104]

알바라도는 왼쪽 허벅지에 부상을 입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았다.[104] 그는 전쟁을 포기하고 동생인 곤살로 데 알바라도에게 임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했다. 이후 두 차례의 추가 원정(1525년 첫 번째, 1528년 소규모 부대)을 통해 피필족을 스페인의 지배하에 두었다. 1528년 쿠스카틀란 정복이 완료되고 산살바도르 시가 건설되었다.[104]

5. 페루 원정과 온두라스 통치

1532년경, 알바라도는 에르난 코르테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더 이상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때 알바라도는 국왕에게 태평양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탐험하여 왕실을 위해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을 정복할 허가를 요청했고, 특히 코르테스가 자신과 동행하는 것을 거부했다.[99] 1534년, 알바라도는 페루의 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안데스 산맥 남쪽으로 향하여 키토 지방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 이미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부관 세바스티안 데 벨랄카사르가 그 땅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두 정복자 군대는 거의 전투를 벌일 뻔했지만, 알바라도는 비교적 적은 금액으로 피사로의 무리에게 자신의 배, 말, 탄약과 대부분의 병사들을 넘겨주고 과테말라로 돌아갔다.[51]

1532년, 알바라도는 온두라스 주지사로 임명하는 왕실 칙령을 받았지만, 당시 온두라스는 트루히요에 있는 스페인 정착민들의 단일 정착지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1533년 또는 1534년 그는 과테말라 인근 온두라스 지역에 자신의 노예 아프리카인과 원주민 노동자들을 보내 사금 매장지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1536년, 당시 온두라스 주지사 직무대행인 안드레스 데 세레세다의 지원 요청 편지에 응답한 것으로 알려진 알바라도와 그의 인디언 동맹군은 온두라스에 도착했는데, 마침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들이 온두라스를 버리고 페루에서 금을 찾으러 가려던 참이었다. 1536년 6월, 알바라도는 울루아 강 유역 하류에서 시쿰바가 이끄는 원주민 저항군과 교전하여 승리했다. 그는 인디언 노동력을 그의 군인들과 일부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레파르티미엔토'' 형태로 분배하고 과테말라로 돌아갔다.

1537년 스페인 방문 중 알바라도는 향후 7년 동안 과테말라 주지사직과 함께 온두라스 주지사직을 재확인받았다. 그러나 그의 온두라스 주지사직은 논란이 없지 않았다. 프란시스코 데 몬테호가 경쟁적인 주장을 펼쳤고, 1540년 스페인 국왕에 의해 온두라스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6. 죽음

크리스토발 데 오냐테(Cristóbal de Oñate)의 도움 요청을 받은 알바라도는 군대를 이끌고 오냐테를 도우러 갔다. 그러나 1541년, 알바라도는 이상한 사고로 놀란 말에 치여 크게 다쳤다.[100] 며칠 동안 고통 속에 있다가 1541년 7월 4일 사망하여 파츠쿠아로(Pátzcuaro)와 모렐리아(Morelia) 사이의 티리페티오(Tiripetío) 마을(현재 미초아칸(Michoacán)) 교회에 매장되었다.[100]

텔레리아노-레멘시스 사본에 묘사된 알바라도의 죽음. 그의 머리 오른쪽에 있는 글리프는 그의 나우아틀어 이름인 ''Tonatiuh''("태양")을 나타낸다.


알바라도 사후 40년 후, 그의 혼혈 딸 레오노르 데 알바라도 시코텐카틀(Leonor de Alvarado Xicoténcatl)은 그의 유해를 과테말라로 이장하여 산티아고 데 로스 카바예로스 데 과테말라(Santiago de los Caballeros de Guatemala) 시(현

안티구아 대성당 폐허에 있는 페드로 데 알바라도의 묘를 표시하는 현대 기념비

7. 결혼과 자녀

알바라도는 두 번 결혼했지만, 모두 자녀를 두지 못했다. 그의 동거녀는 틀라스칼라 왕 시코텐카틀 엘더의 딸인 나우아 귀족 여성 루이사 데 틀라스칼라였다. 루이사는 1519년 아버지에 의해 존경과 우정의 표시로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주어졌고,[100] 코르테스는 그녀를 페드로 데 알바라도에게 맡겼다.[100] 알바라도는 곧 그녀와 연인이 되었다. 루이사는 멕시코 중부를 넘어 알바라도의 정복 활동에 동행했다. 비록 합법적인 아내는 아니었지만, 루이사 데 틀라스칼라는 알바라도와의 관계와 귀족 출신으로 인해 많은 재산을 소유했고 도냐(Doña)로 존경받았다. 그녀는 1535년 사망하여 과테말라 대성당에 묻혔다.

루이사 데 틀라스칼라와 알바라도 사이에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

이름설명
레오노르 데 알바라도 이 시코텐가 테쿠발시산티아고 데 로스 카바예로스에서 태어났으며, 장인이 신뢰하는 정복자 페드로 데 포르토카레로와 결혼했다. 이후 프란시스코 데 라 쿠에바 이 구즈만과 재혼했다.[100] 알바라도 가문의 재산은 그들의 후손에게 여러 세대에 걸쳐 남았다.
페드로 데 알바라도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100] 스페인으로 여행하던 중 바다에서 실종되었다.
디에고 데 알바라도"메스티소(El Mestizo)"라고 불렸으며, 1554년 페루 내전에서 사망했다.



그 외 다른 여성들과의 사적인 관계에서 두 명의 자녀가 더 있었다.


  • 고메스 데 알바라도(Gómez de Alvarado): 자세한 기록이 없다.
  • 아나(아니타) 데 알바라도(Ana (Anita) de Alvarado)

8. 평가와 유산

알바라도는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었지만,[5] 잔혹하고 냉혹한 인물로 평가받는다.[12] 아즈텍인들은 그의 금발 머리와 악명 높은 성격 때문에 토나티우라고 불렀다.[8][9] 그는 친근한 모습을 보였지만, 변덕스럽고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었다.[11]

역사가들은 알바라도의 탐욕이 과도한 잔혹 행위로 이어졌다고 평가하며,[12] 그의 스페인 동시대인들조차 그의 잔혹성을 비난했다.[13] 테노치티틀란 대사원에서 일어난 대학살과 같은 그의 전술은 전략적 고려를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14] 그는 정복한 영토의 총독으로서도 무능했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모험을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3]

알바라도는 통치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식민 통치의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거의 노력하지 않았다.[17] 그의 편지에는 민정 문제에 대한 관심이 없고, 탐험과 전쟁에 대한 내용만 담겨 있었다.[17] 과테말라 총독 시절, 알바라도는 스페인 왕실의 조세 제도 수립 시도에 저항하며 과테말라를 자신의 사유지로 여겼다는 비판을 받았다.[1]

미국의 역사가 윌리엄 H. 프레스콧은 알바라도가 용감하고 기사도적인 면모를 지녔지만, 경솔하고 탐욕스러우며 잔혹한 심장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묘사했다.[1] 스페인 연대기 작가 안토니오 데 레메살은 알바라도가 신하들에게 사랑받기보다는 두려움을 받기를 원했다고 기록했다.[16]

알바라도의 잔혹 행위는 에르난 코르테스프란시스코 피사로와 같은 다른 정복자들도 저질렀지만, 알바라도는 유독 더 많은 비판을 받았다.[17]

8. 1. 부정적 평가

페드로 데 알바라도는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었지만,[5] 잔혹하고 냉혹한 인물로 평가받는다.[12] 아즈텍인들은 그의 금발 머리와 악명 높은 성격 때문에 그를 토나티우라고 불렀다.[8][9] 그는 친근한 모습을 보였지만, 변덕스럽고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었다.[11]

역사가들은 알바라도의 탐욕이 과도한 잔혹 행위로 이어졌다고 평가하며,[12] 그의 스페인 동시대인들조차 그의 잔혹성을 비난했다.[13] 특히 테노치티틀란 대사원에서 일어난 대학살과 같은 그의 전술은 전략적 고려를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14] 그는 정복한 영토의 총독으로서도 무능했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모험을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3]

알바라도는 통치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식민 통치의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거의 노력하지 않았다.[17] 그의 편지에는 민정 문제에 대한 관심이 없고, 탐험과 전쟁에 대한 내용만 담겨 있었다.[17] 과테말라 총독 시절, 알바라도는 스페인 왕실의 조세 제도 수립 시도에 저항하며 과테말라를 자신의 사유지로 여겼다는 비판을 받았다.[1]

미국의 역사가 윌리엄 H. 프레스콧은 알바라도가 용감하고 기사도적인 면모를 지녔지만, 경솔하고 탐욕스러우며 잔혹한 심장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묘사했다.[1] 스페인 연대기 작가 안토니오 데 레메살은 알바라도가 신하들에게 사랑받기보다는 두려움을 받기를 원했다고 기록했다.[16]

알바라도의 잔혹 행위는 에르난 코르테스프란시스코 피사로와 같은 다른 정복자들도 저질렀지만, 알바라도는 유독 더 많은 비판을 받았다.[17]

8. 2. 한국에서의 평가

대한민국에서는 알바라도의 잔혹한 행위가 주로 부각되어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진보적 역사관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알바라도를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으로 간주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8. 3. 현대 문화에서의 묘사

페드로 데 알바라도는 소설, 단편 소설,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에서 묘사되었다. 루 월리스의 소설 《공정한 신》에서는 몬테수마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지기도 했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 《신의 서기》에서는 주인공 찐아칸을 고문하는 역할로 등장한다.[103] 에드워드 릭포드의 역사 소설 《뱀과 독수리》에서는 아즈텍 제국 정복 초반 몇 달 동안의 이야기가 그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또한, 에르난 코르테스를 다룬 드라마 《에르난》에서는 배우 미셸 브라운이 알바라도 역을 맡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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